2015년 10월 30일 금요일

불확실성에 대하여

인간이 취하는 선택이라는 것이 사실 확실한 결과를 보장하는 것은 얼마 없다. 그렇기 때문에 보험이나 선물같은 금융상품도 출현한 것이고 우리에게 불안감이 항상 내재해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불확실성과 위험 이론은 굉장히 흥미롭고 계속 공부해보고 싶다. 무지 어렵긴 하지만 말이다.
기존의 선호체계에 의한 효용함수와 예산선을 이용한 소비자 선택에서는 불확실성이 고려되지 않는다. 즉 확률이 100%인 것이다.
여기에 불확실성의 개념이 들어오면 확실한 상태란 없어지고 만다. 내일 온도가 10도 이하이면 고구마 장사로 10만원을 벌 수 있을텐데, 그렇지 않으면 3만원밖에 벌지 못한다. 나는 그런 상황에 대비해 옆의 감자장사 하는 사람과 거래를 예비해놓는다. 그는 내가 10만원 벌 때 3만원을 벌고 내가 3만원을 벌 때 10만원을 번다. 그렇기 때문에 각 상황에 대해 서로가 가진 것을 교환하겠다는 약속으로 지금 둘은 미리 거래를 한다. 여기에 기대효용이라는 개념이 들어온다. 각 상황에 처할 확률에 따라 각자의 효용이 달라지기 때문에 효용은 확률의 기대값에 의존한다. 예전처럼 Max U를 통해 극대화를 하는 것이 아닌 Max E(u) 처럼 기대효용을 극대화 한다. 이런 식으로 새로운 형태의 효용함수와 예산선을 통해 기존의 일계조건을 이용하여 균형가격과 자원배분을 구하게 된다.
이런 기본적인 모형에서부터 시작해 금융자산 가격 결정모형에 이르기까지  확률이 가미되면 한도 끝도 없이 복잡해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또 현실에 좀 더 가까워지는 것이기도 할 터이니, 현실에 가까워질 수록 모형화하기는 정말 어려워지는 것이다.

뒷걸음질 치기

남들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길이 더 나은 미래를 보장해주고 뿌린만큼 거둘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온통 불확실성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지금의 세태에 자신을 끼워 맞추기가 죽기보다 싫기에 혹은 단순히 남들이 하는 것을 피하려는 의도에서 그 어려운 길을 묵묵히 걸어간다.
그런 길을 가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어찌보면 쉬울 수 있다. 관습적으로 인정되는 것을 비꼬고 안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니까. 하지만 자신이 택한 그 길을 실제로 따라가는 삶을 생각해보자. 과연 그 길에는 과거에 자행했던 선택에 대한 만족과 자부심이 남아있을 것인가. 세상의 모진 풍파에 맞서 결국은 그 길을 굳건히 지켜내고 또한 넓혀나감으로써 더 많은 사람을 동지로 삼아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려면 단순히 결심만으로는 안될 것이다. 주류의 삶에 동참하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그것이 얼마나 달콤하고 편안한 길인지를 반증하는 것이다. 그 모든 유혹들을 뒤로 하고 그가 생각했던 길의 끝에 도달했다. 그는 후회하지 않을 것인가. 내가 정말 잘했노라고 뒤를 돌아보며 말할 수 있을까. 우리 눈에 보이는 눈 앞의 현상들은 이런 걸 절대로 말해주지 않는다. 자유로운 선택에 대하여 참다운 자유를 고민하는 사람은 그 자유로 인해 남들보다 배로 괴로운 지도 모르겠다. 네 꿈을 펼쳐라 라는 말은 자라나는 세대에게 정말 도움이 되는 경구일까 아니면 그를 시궁창으로 몰아넣을지도 모르는 무책임한 사주일까.
내가 가진 것들, 내가 속해 있는 상황에 대해 솔직해지기 그리고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나의 유한함을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때이다.

2015년 10월 11일 일요일

공부하면서 드는 잡생각들.

1. 문제는 미시다.
여러 과목들 100%는 아니어도 어느정도 내 것으로 만들어 가면서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고 납득하고 있는데 미시는 할 때마다 진짜 난해하다. 왜 뒷부분을 보통 미시경제학 시간에 안가르치는지 알 것 같다. 교재 전체적으로 보면 적은 부분이지만 그 안에서 균형이나 최적을 따지려면 이제까지 배웠던 걸 총동원 하면서 새로운 개념을 적용해야 되니까 너무 받아들이기가 어려운데다가 여러 복잡한 노테이션들까지 더해지니 아주 설상가상이다. 문제가 쉬운데 내가 복잡하게 생각하는 건지 문제가 어려우면 파라미터들 좀 줄여주고 숫자좀 깨끗하게 해주시지 정말 풀면서도 맞게 하고 있는건지 알 수가 없고 그 숫자들 안에 파묻히면 도대체 내가 하고 있는게 경제학이 맞는가 하는 의구심도 든다. 항상 이런 수학적인 부분이나 증명/정리들을 볼 때 그 자체를 파악하면서도 우리가 알아야할 본질적인 부분, 원론 시간 때부터 배웠던 것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혹은 수식에서 그런 것들이 어떻게 도출된 것인지 생각해봐야 중심이 흔들리지 않을텐데 그냥 아무생각 없이 수에 파묻히다 보니 그런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다. 이래서 수학적인 능력이 탁월하면 경제학 할 때 편하다고 하는가보다. 아무튼 어쩌겠는가. 이미 쏟아진 물, 걸레로 닦아서 컵에 다시 담아보려는 노력이라도 해야지.

2. 수학용어나 여러 학술적인 용어들을 책에서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정말 와닿지 않는 한자어들을 잘도 갖다붙인 것 같다. '이산'이라는 말만 봐도 대체 이게 무슨의미인지 확 와닿지도 않는다. discrete 이러면 참 멋져보이는데 말이다. 그래서 교수님들도 보면 다 영어로 말하고 그러지 어려운 한자어는 그들도 잘 모르더라. 궁금한 것은 왜 그럼 일본놈들이 지들 멋대로 번역해 놓은 것들을 바꾸려는 노력조차 없는 것일까. 협회, 학회 등에서 만나면 그런 것좀 했으면... 용어부터 자체적으로 만들어 나가려 해야 학문적으로도 독립적으로 성장해나갈 수 있지 않을까 지금처럼 외국 추세에 그대로 편승하기보다는. 뭐 그냥 잡생각이다.

2015년 10월 9일 금요일

노년의 쿨함

△<인턴> 미국 포스터. 한국 것과 다르지 않구나.

 영화를 볼 때 관심둬야 할 것으로 다른 것들도 많겠지만 보통 스토리나 연출방식 혹은 대사 라인 하나하나가 감상자의 머릿 속에 꽂힐 것이다.
<인턴>의 경우 한 인물이 영화 전체를 지배한다. 자칫 평범해질 수 있는 영화를 특별하게 만들어 준 것은 로버트 드니로이다.
영화에서 드니로는 주연이자 때로는 조연이고 또한 이 영화가 가진 주제 그 자체이다. 드니로는 극중에서 은퇴한 70세의 노인으로 분한다. 그는 안정된 삶을 누리고 있고 은퇴생활을 여유롭게 즐기지만 무언가하나가 빠진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반 평생을 몸 담았던 직장에서의 생활이 빠진 것이 아무렇지 않을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던 중 사회공헌 활동의 일환으로 앤 해써웨이가 사장으로 있는 회사에서 낸 senior internship 채용공고를 통해 70대 노신사와 젊은 여자CEO가 만나게 되어 생기는 일이 영화의 내용이다.

이 영화가 독창적인 구조나 컨셉 등을 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회사 내에서 일어나는 바쁘고 활기찬 분위기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보는 듯 하기도 하다(주인공마저 같다).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의 지극히 정석적인 구조를 취하고 있으며 중간중간의 유머코드들도 그다지 새롭지 않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는 내내 전혀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드니로가 말단의 인턴의 입장에서 어떻게 다른 인물들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어떤 자세를 취하는지를 보는 것이 이 영화의 묘미이다. 이 노인은 너무나 빨라진 이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도 보이지만 그간의 경험을 통해 아주 능숙하게 일처리를 하며 사원들의 고민들을 모두 해결해주는 키다리아저씨 같은 인물로 변모해 간다. 바로 이러한 점들 때문에 영화 내내 그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Cool함이 단순히 무책임하고 남들 신경안쓰는 태도를 의미하는 것 같은 이 시대에 드니로가 보여주는 cool함은 모두를 아우르며 그의 존재감을 각인시킨다.

드니로는 분명 영화의 주연이지만 인물들 간의 관계에서 봤을 때 전혀 주연이 아니다. 그는 모두에게 조연이다. 언제나 그렇다. 그는 옆에 있는 사람을 치켜주지 자기를 높이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마치 전장에서 없어서는 안될 참모처럼 사람들의 간지러운 부분을 정확히 터치해 준다. 격식을 차릴 줄 알고 묵묵히 자기의 자리를 지키며 오해를 받아도 먼저 숙이고 들어가는 참된 신사의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의 인물을 보며 외양이 아닌 다른 것에 감탄하기는 쉽지 않은데 정말 그의 대사의 톤부터 몸짓까지 배우지 않아야 할 것이 없게 느껴진다. 그만큼 로버트 드니로는 연기를 잘해냈다. 어쩌면 그의 실생활이 그러하기 때문에 그렇게 자연스럽게 녹여낼 수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오랜만에 극장에서 본 영화였는데 가벼운 오락영화이면서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 작품이었다. 물론 모든 대사에 동의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70살 쯤 먹어서 내 신념 뚝심 있게 지키면서도 나이 불문하고 동료들과 이웃들과 상호작용할 수 있으면 얼마나 뿌듯할까.

현실은 지하철 노약자석일라나... 그래도 한 살 한 살 나쁘지 않게 먹어가고 있다.

2015년 10월 1일 목요일

내게 단조성은 없다

흔히 경제학이 그렇듯이 미시경제학에서도 가정이 정말 많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라면 '단조성'이 있을 것이다. 효용의 단조성(monotonicity)으로 인해ㅡ물론 한계효용이 체감하긴 하지만ㅡ 우리는 재화 하나를 더 사면 효용이 증가할 것이라고 본다. 따라서 내 소득인 I=p1x1+p2x2+.... 가 주어졌을 때 효용 u(x1,x2, ...)을 최대화하기 위해서는 내가 가진 모든 소득 I를 다 써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득을 벌자마자 다 쓰는 사람들은 없다. 투자도 하고 나중을 위해서 괜히 쌓아둔다.
단조성이 보장되지 않는 것이다.

나도 그렇다. 정말 사고 싶은 게 많다. 이것저것 필요한 것도 많고 사도 후회는 안할 것 같다. 그런데도 내 통장잔고를 0으로 만들 수가 없다. 돈 버는 게 아닌 룸펜 생활을 하고 있으니 예비자금이 없는 것은 항상 불편함을 야기한다. 돈을 물건으로 만들어서 얻는 효용보다 돈이 줄어듦으로 인해 감소하는 효용이 더 큰 것일까. 모르겠다. 하고 싶은 걸 하면 좋긴 할텐데 그 이후엔 더 큰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니. 정말이지 궁상맞다.

2015년 9월 30일 수요일

무역의 발생: 절대우위

 
손이 없는 남자, 아담 스미스의 불후의 저서 국부론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분업에 관한 글이 있다.
하나의 예시를 들어서 을 만드는 공장이 있다고 치자. 이곳에서 일하는 A는 하루에 핀 20개를 만들 수 있다. A랑 똑같은 수준의 공돌이가 10명이 있다고 하면, 이 핀 공장은 하루에 200개이상의 핀은 만들 수 없다.그런데 이 핀 공장이 공정을 18개로 나누어 공돌이 10명에게 작업을 시켰더니 하루에 약 48,000개를 생산할 수 있었다. 분업 하나만으로 생산성이 무려 240배로 뛰었던 것이다.
아담 스미스는 단순히 분업의 효율성을 말하려 했던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국가 간의 무역이 어떻게 발생하는지를 설명하려 했다. 그 당시만 해도 중상주의 (세계 경제와 무역의 총량이 불변이라는 가정 아래 자본의 공급에 의해 국가가 번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경제 이론:위키피디아) 아래 선진국들은 국부를 다른 나라와 교환하지 않고 내부적으로만 생산 및 소비를 하려 했다.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당시의 무역정책들은 부가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기회를 버리는 비효율적인 방식이었지만 그 당시의 정치가들은 그러한 중상주의가 국가의 부를 늘려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반대하여 아담 스미스는 교환경제의 이점을 들며 무역을 통해 자원을 거래할 때 교역을 하는 국가 모두가 이익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절대우위론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unit requirement라는 개념이 필요하다. 이것은 한 단위의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의 양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산성과 역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이용해 a국과 b국의 무역 전과 무역 후의 생산량의 차이를 알아볼 수 있다. 두 국가 모두 200명의 노동자가 있다고 해보자(여기서는 완전고용을 가정한다). 이 때 a국의 경우 포도 한 단위를 생산하는 데 4명, 치즈 한 단위를 생산하는 데에는 2명이 필요한 반면 b국은 이와 반대로 포도 한 단위 생산에는 2명, 치즈 한 단위 생산에는 4명이 필요하다고 가정하자. 따라서 a국에서 포도 하나를 생산하는 데에는 치즈 2단위의 기회비용이 들며 치즈 생산하는 데에는 1/2단위의 포도가 기회비용이 된다. 당연히 b국에선 이와 반대이다. 이 경우 a국은 b국보다 치즈 생산하는 기술이 더 좋고 b국은 a국보다 포도 생산하는 기술이 더 좋으므로 생산이 능한 각 재화에 각국이 절대우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무역의 이점은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 무역 전 각 국은 100명 씩의 일꾼이 각 산업에 종사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a국은 포도를 25개, 치즈를 50개 생산할 수 있고 b국은 포도 50개, 치즈 25개를 생산할 수 있다. 따라서 총 75개 씩의 포도와 치즈를 생산하는 것이다.
절대우위에 따라 각 국이 특화를 한다면 a국은 치즈를 100개 생산할 수 있고 b국은 포도를 100개 생산할 수 있다. 총 100개의 치즈와 100개의 포도가 생산되는 것이다.


무역 이전 각국의 생산능력

 

무역 이후 각 국의 생산점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말하자면 무역으로 인해 '생산가능곡선'이 확장된 것이다. 이와 같이 우선 각 국이 특화를 한 이후 무역장벽을 헐면, 교환을 통해 원래 소비했던 소비묶음은 유지하면서도 경제 전체적으로 더 많이 생산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무역을 통한 자원교환으로 더 많은 효용을 얻을 수 있음을 보인 아담스미스는 중상주의에 맞설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절대우위 이론은 한 국가가 모든 재화에 절대우위가 있을 때의 무역은 설명하지 못한다. 즉 선진국과 후진국 간의 무역을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결점을 흔히 리카디안 모형으로 불리는 비교우위 이론을 통해 극복해볼 수 있다.

2015년 9월 10일 목요일

ㅃㄷㄱㄹ

기록해야 할 것이 떠올랐을 때는 지체하지 않고 어디든 써야한다.
더더군다나 시간이 갈 수록 머리가 맛이 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메멘토 주인공마냥 나의 기억과 사고력에 도움이 되어줄만한 도구들을 적극 이용해야 한다.
인터넷 메세징이든 제대로된 글이든 쪽지에다가 갈겨쓴 메모이든 어디엔가 save해놓아야 한다. 내 뇌는 더이상 HDD기능을 못한다. 매 시간 재부팅되는 RAM이다. 이놈의 돌대가리

2015년 9월 8일 화요일

동조적 효용함수

동조적 선호(homothetic preferences)를 나타내는 효용함수(utility function)
소비자의 선호가 동조적일 경우, 그의 선호는 재화1과 재화2의 비율에 따라서만 결정된다.
(x1,x2) ≥ (y1,y2) 라면 (2x1,2x2) ≥ (2y1,2y2) 이고... (tx1,tx2) ≥ (ty1,ty2)가 된다.
대표적으로 콥-더글라스 효용함수를 동조적효용함수로 볼 수 있다.
ex)U(X1,X2)=X1^(1/3)X2^(2/3)
→ MRS=MUx1/MUx2= (1/2)(x2/x1)
이 경우 x1과 x2의 비율만으로 MRS가 결정된다.























이런 식으로 동조적 효용함수에서는 소득이 일정하게 증가함에 따라 수요량도 일정하게 증가한다. 따라서 모든 선택점의 기울기가 같으며 MRS가 같아진다.

Back to Normal

지치고도 지친다. 하는 것이 없어도 피곤하고 인간적 교류는 적은데 사람들에 대한 염증은 늘어간다. 삶에 대한 애착을 그래프로 나타낸다면 지금의 나는 정상상태보다 훨씬 밑에 있을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반추'하고 싶은데 나는 더 이상 멈추지 않는다. 끊임없는 자극을 원하며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에 대해 느끼는 지루함 같은 것이 안정을 막아서곤 한다. 외국인들은 이런 이유로 마약을 시작하곤 하겠지. 삶에 대해 감사함을 느끼지 못하며 타인과의 관계에서 즐거움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책없는 절망감보다는 나에 대한 냉철한 분석이 필요한 때이다. 몸은 안다. 그래서 몸이 변화할 때 그것의 이유를 깨닫지 못하면 엉뚱한 곳에서 결론을 도출하려고 하는 것이다. 원인은 어느정도 분석됐다. 이제는 정말로 실천을 해야만 한다.

2015년 8월 2일 일요일

내 주위를 휘감는 웅장함이 필요하다



 그 안에서 오로지 한 곳에만 집중해서 몇십 분이라도 있고 싶다.


Planets 시리즈는 3년전에 음악 교양수업 들을 때 교수님이 다 들려줬었던 것 같은데
작곡가 이름을 까먹고 있었다. 다시 찾아서 들으니 역시 좋다.
클알못이지만 보통 클래식 곡들하면 떠오르는 인상과는 달리 뭔가 만화주제곡으로 쓰여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힘을 내야만 할 것 같은 느낌.

2015년 7월 13일 월요일

단상

 연금 개혁한다고 한바탕 난리 난리 치다가,
그놈의 메르스로 온 나라가 떠들썩해지더니만 좀 잠잠해지니 이번엔 3권분립이 뭔지도 모르는 발언을 대통령이 하면서, 한나라의 여당에서 일련의 촌극이 벌어지고 말이야  

내년이 벌써 총선이니 또 앞으로도 계속해서 난리가 벌어지겠지 예능으로 치면 재밌다고 느낄 수도 있겠는데 이게 한 나라에서 시도때도 없이 벌어지는 일이라니 참..
 해가 지나도 어찌이리 똑같은 일들만 일어날까

2015년 6월 25일 목요일

2015 봄학기를 마감하며

 이번 봄학기 동안 태풍의 눈에 들어가 있었던 것 같다. 조금만 긴장을 늦춰도 휩쓸려 갈 것 같은, 그만큼 한 시도 나를 놓고 있을 수 없었고 이래서 사망년 사망년 하는구나 하는 사실을 조금 깨달았던 학기였다.
항상 시작할 때는 포부도 크고 이루고 싶은 것도 하나씩 둘 씩 생각해보면서 여러가지 꿈을 꾸는데 끝날 때쯤 되면 뭐든 될대로 되라지라고 생각하며 마무리하게 된다. 뭔가를 이루는 사람과 그 문턱에서 서성대는 사람들의 차이란 이런걸까.
아쉬움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다.  어딘가에 투자할 때는 결과로 얻고자 하는 보상이 있기 마련이다. 공부를 하고 새로운 것을 배울 때 즐거웠고 그것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으로 나를 만족시키고 싶지만 성적표에 찍히는 다채로운 문자들(대체로 뾰족했으면 좋겠는데) 을 보면 1학기 동안 시험의 스트레스 외에도 분명히 누릴 수 있었던 학문적 즐거움들은 저만치 먼 곳으로 내보내게 된다. 좋은 강의를 듣고 있고 내게 도움이 되는 것이 분명하다는 느낌 외에 내가 정말 잘하는 구나, 내가 성적으로 교수에게 인정받았구나, 하는 경험을 하고 싶다. 전공에 대해 좋아하고 공부하는 것에 100%는 아닐지언정 다른 활동을 하는 것만큼의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데 결과가 그만큼 따라주지 않으니 답답한 마음이 든다.
내가 공부했던 습관을 돌아보고 내가 정말 좋은 결과를 얻기위해 제대로 하였나를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공부에도 전략이 있고 더 높은 학습능률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나는 아직도 'input을 100만 개 넣으면 그 중 100개라도 건지겠지'라는 식의 안일한 생각으로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싶다. 아직도 중,고등학교 시절의 학습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기도 하고... 군대 갔다와서 머리는 더 굳었는데 방법적 측면에서도 더 나아진 건 없어 보인다. 수업을 들을 때나 공강 시간에 도서관에서 공부할 때나 분명 앉아 있었고 졸았던 것 아닌데 생각해보면 그 시간동안 정말 내가 그것을 알기 위해 노력했던가 모르는 것에 대한 집요함이 있었나 생각해보자.
이해를 했다면 남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 물어보더라도 쉽게 설명해주고 내가 아는 것을 여러방식으로 제시할 줄 알아야 정말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번 시험의 형식들이 대부분 이런 것에서 벽에 부딪혔던 것 같다. 대학 시험이 다들 그렇지만 특히 경제학은 내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계속해서 물어본다. 설명해라. 답에 대한 근거를 대라. 문제의 솔루션으로 가는 것을 보여줘라 등. 한 학기 동안 내 뇌구조에 대한 답답함을 느꼈다. 분명히 어렴풋하게 이유를 알겠는데, 말로 표현하려면, 글로 그것을 체계적으로 보여주려면 항상 역부족이었다. 금융위기에 대해 다 알고 있고 어떤 흐름 때문에 그런 결과가 초래되었는지 알고 있는데, 막상 내뱉는 건 교과서 암기하는 것만도 못한 초등학생 스러운 문장들이다.
이번 방학동안에는 이런 것들을 중점적으로 해결하고 체계를 갖추는 노력을 해야할 것 같다. 진도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확히 알고 넘어가야 다음에 다시 또 똑같은 것을 보느라 헤매는 일을 막을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내가 생각했던 바에 대해서 기록해놓자. 언젠가부터 귀찮아서 그런건지 기록하던 습관을 놓아버린 것 같다. 생각에는 정리가 중요하고 공부에는 마무리가 제일 중요한 것 같다. 그냥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안된다. 핵심을 파악하자. 내가 모든 부분에서 조금씩 부족한 건 그것 때문이다.

2015년 5월 25일 월요일

죽겄다 죽겄어

3학년.............................그리고 사망년.......................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렇게 살고 있는지 몰라도 정말 미친듯한 챗바퀴다. 2년 넘게 학교를 다녔지만 이렇게 학교 다니는게 힘들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거리가 가까워져서 수업 외적으로는 힘들 일이 없어졌지만, 그만큼을 다른 활동으로 채우고 남는 시간은 부족한 공부로 매꾸니 정말 나를 위해 쓰는 시간은 10%도 되지 않는 것 같다. 심지어 씻는 것도 대충대충하게 되는 것 같고.. 이러다보니 진짜 중요한 내 삶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과 같은 곳에 시간을 못 쓰게 된다. 글쓰기나 책읽기(교과서 말고)는 거의 불가능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사실 공부안하고 있을 때 활자를 읽는 것도 싫다 이젠. 머리가 포화상태로 향하고 있는 상태.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수들은 점점 미쳐 날뛰고 있고 과제는 쿼드라틱으로 늘어나고 있다. 하나라도 놓치면 정말 퍼져버릴 지경. 그러지 않기 위해 눈이 감기고 피하고 싶은 욕망이 들 때에도 나를 더 다잡는다. 아...........놀고 싶다.

2015년 1월 18일 일요일

증오가 넘치는 세상

 요즘 "극혐"이란 말이 유행이다.
너무 오버스러운 지적일 수도 있지만 이런 단어의 형성만 봐도 한국 사회가 얼마나 자기 잣대에 어긋나는 사람을 그 상황에서 배제하려하고 서로간의 연결을 단절시키고 있는 지 알 수가 있다. 싫은 것에 대해 말하는 것도 분명 필요한 일이지만 좋은 가치들에 대해 나누기에도 아까운 시간들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장난에서 시작한 "누구누구 극혐!" 이런 식의 언행이 하나의 사고방식으로 구조화되면서 어떤 사람 혹은 어떤 사안에 대해 안 좋은 부분이 발견되면 '아, 저건 저러니까 극혐.. 버려야지'라는 식의 사고를 나도 모르게 하곤 하는 것 같다. 삶의 반경이 좁아질수록 세상을 대하는 태도도 한 방향으로 흐를 가능성이 생기게 된다. 부딪히면 이기려는 생각보다 먼저 당신은 어떤 사람이고 왜 나와 다른지에 대해 알려는 사고방식이 필요한 것 같다.

 어제 어린이집 선생의 '어른'답지 못한 처사에 대해 뒤늦게 접하고 나서 폭력을 무기로 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또 한번 생각하게 됐고 자신보다 한참 작고 약한 존재를 그렇게밖에 대하지 못하는 비겁함에 대해 참을 수없이 부끄러웠다 내가 한 짓이 아님에도. 어른을 적, 혹은 복종해야 할 군주라고 여겼을 그 아이들이 딱하다. 정말 김치를 안 먹는 게... 그렇게 분했을까? 그래서 그렇게 저항도 못할 존재에게 그런 짓을 한 걸까? 분노해야 할 것에 정당하게 분노하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 정말로. 괜시리 김치한테까지 미안해지는 밤이다.